조상의 그림자에서 영혼의 각성으로

상실이 드러낸 삶의 본질

어젯밤 나는 많이 울었다. 오래 눌러 두었던 슬픔이 마침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지나갈 것을 알면서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던 동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길고 끝나지 않을 듯한 슬픔과 눈물 뒤에 찾아온 것은 꺠달음이었다. 이것이 육체적 삶의 자연스러운 순환이라는 사실. 갑작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이 모든 일이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서서히 느끼고,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겨진 이들이 배워야 할 과제라는 것. 나는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동생은 2026년 1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다섯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넉 달 남짓의 간격으로, 내 삶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이 잇달아 떠났다. 그리고 피콜로, 나의 털복숭이 아들은 2024년 3월 15일 내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내가 처음으로 곁에서 지켜본 육체의 죽음이었다. 육체의 끝자락에 스며드는 마지막 고요와, 내 안에서 터져 나온 이별의 비명을 듣게 해 준 존재.

아이 같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다시 찾아와, 육체가 없어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준 존재였다.

준비 없이 닥쳐온 세 번의 죽음. 세 명의 사랑하는 존재. 그 대칭은 거의 외과수술처럼 정교했다 — 한 주기의 끝과 시작, 그들이 선택한 화창한 금요일들, 그리고 그때마다 나를 무상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던 방식까지.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삶에 대해 저마다 다른 것을 내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준비 없이 닥친 세 번의 죽음, 세 명의 사랑하는 존재. 그 대칭은 거의 외과 수술처럼 정교했다. 한 주기의 끝과 시작. 그들이 택한 듯한 화창한 금요일. 한 주기의 끝과 시작. 그들이 택한 듯한 화창한 금요일. 그때마다 나를 무상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 그들의 떠남.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저마다 달랐다.

사자자리로 태어난 피콜로는,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들이 지나간 후, 어느 금요일 아침 눈부신 태양을 향해 떠났다. 피콜로가 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나는 항상 이런 말을 했었다. "피콜로, 너의 의지를 거스르는, 네 허락이 없는 그런 죽음을 절대 강요하지 않을거다. 언젠가 네가 그 아픈 육체를 스스로 버리고 싶을 때가 오면 네 방식대로 가는 거야. 내 품에서 네가 스스로 세상을 떠날 거라고 약속해 줘." 그리고 피콜로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피콜로를 안고 그 작은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 감각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내 속에서 터져 나온 요란한 울음에 나 자신이 화들짝 놀랐다. 그 울음은 육체와 헤어지는 소리였을까. 피콜로는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육체가 스러지는 일에 항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있는 그 순간에 머무는 일이 무엇인지. 사랑으로 선택한 죽음의 친밀함이 무엇인지.

엄마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통해 내게 길고 느린 작별을 선물해 주셨다. 그녀가 하루하루 조금씩 스러져 가던 그 시간은, 지켜보고 성찰하며 마음을 준비할 여유를 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의 엄마였던 형상이 서서히 풀려 가는 과정이었다. 이 생 이전에 우리가 맺은 영혼의 계약이 그 끝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게 해 준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 생의 모습을 하나씩 잃어 가는 동안, 우리 둘은 엄마와 딸이었던 그 계약이 끝나 감을 함께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내게 인내와 지구력을, 길게 이어지는 놓아줌 속에서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동생은 예고도, 준비할 의식도 없이 떠났다. 받아들일 틈이 없을 만큼 빨랐다.
그런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직 닫히지 않은 물음만 남겼다.

엄마의 떠남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 작별이었다면, 동생의 죽음은 있던 자리에 빈자리만 남는 일이었다. 준비할 시간도, 조금씩 놓아주는 과정도 없이, 심장이 휘청이는 그 충격을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먼저 육체와의 이별이 오고, 울음이 터지는 동시에 침묵이 스며든다. 그리고 뜻밖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존재감이 다시 이어진다.

이제 나는 현실이 홀로그램처럼 겹쳐 있음을 본다.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다. 깊은 감사로 보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보여 줘서 고마워.” 이 사건들은 무작위가 아니다. 길을 알려 주는 표식이자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영혼이 그 의미를 놓치지 못하도록, 입구가 빠르게 잇따라 열린 것이기도 하다.

이번 생은 이제 마지막 국면처럼 빽빽함을 느낀다. 더 이상 배움이 천천히 오지 않는다. 급작스러운 충격을 막아 주던 층도 걷힌 듯하다. 몸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 받아들임을 머리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의 이별 안에서 실제로 살아내고 있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나는 피콜로를 통해 육체가 얼마나 연약하고 소중한지를 알았다.
엄마와 동생이 맡은 일은 태어나기 전 서로 나누었던 약속이었다. 이 생을 시작하기 전, 베일 너머에서 서로에게 맡긴 역할. 누가 먼저 가고 누가 남아 그 떠남을 배울지 정해 둔 약속.

그들은 내가 그 아픔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들어 주고 있었고,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떠남은 짐을 풀고 앞으로 갈 자리를 열어 주었고, 이제 저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그들의 신비로운 지지를 나는 꿈결처럼 매일 느끼고 있다.

이것이 나의 역할이다. 그 패턴을 끊어 내는 일. 맑은 의식과 방향 안에서 살아가는 일. 내 삶을 통해, 자유가 가능하고 사랑이 이기며 그 순환이 여기서 끝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알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저마다의 전환점에 선 이들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다. 자유인가 억압인가, 진실인가 환상인가, 그 갈림길에 선 이들에게.

우리는 떨어져 있지 않다. 근원에서 갈라진 조각으로, 창조주가 스스로 겪지 못한 것을 몸 안에서 살아내려고 와 있는 것이다. 하나됨은 얼굴이나 핏줄이 아니다. 우리가 빛이고 영혼임을, 그 근원의 일부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곳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자리이며, 다음 여정을 다시 그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각성은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당신이 준비되면, 나의 삶으로 보낸 그 파문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글쓴이: 베로니카 킴, QHHT® 레벨 2 공인 프랙티셔너 & 하모닉 에그® 가디언

베로니카 킴은 현실이라는 광대한 장(場) 안에서 흩어진 점들을 잇는다. 삶의 목적을 멀리서 조망하는 거시적 시야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미시적 관점을 함께 얻도록 안내한다.